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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혼인유감

도린매시 2021. 8. 17. 09:38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왔다.

가족관계등록 업무의 일종인 혼인신고는 주민센터에서는 접수가 되지않고 시, 구, 읍 또는 면 단위에서 처리한다.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혼인신고서 양식을 프린트해서 작성해도 되지만 구청이 집에서 멀지않아 털레털레 가서 한 장 뜯어와 읽어봤다.

애초 혼인신고는 둘의 편의를 위한 행정처리 정도의 의미였기 때문에 엄청난 돈, 시간, 노동력을 할애해야하는 결혼식보다는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식은 꽤 능동적으로 거부한 편이지만(귀찮으니까!) 혼인신고는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기도 했고. 결국 둘 다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서명할 순간이 다가오니 그게 생각 같지 않더라. 부모님 등록기준지는 왜 적어야 하는지 잠깐 의아했지만 이내 넘어가기로 했다. 문제는 4번 '성•본의 협의'였다.

향후 태어날 자녀에게 아내의 성과 본을 물려주는 협의를 했냐는 질문이었는데, 여기에 '예'로 답하려면 별도의 협의서를 제출해야한단다. 물론 남편의 성과 본을 물려주는 것은 그 어떤 협의나 별첨서류 없이 가능하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며 자녀를 가질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여기에 벌써 '예' 혹은 '아니오'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마음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찾아봤다. 답은 '불가능', 협의이혼을 하고 다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가정법원에 가서 '자의 복리'를 위해 성과 본의 변경을 신청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재혼가정의 사례이고 아직 엄마의 성을 물려주기 위해 신청한 사례는 없음, https://m.hani.co.kr/arti/society/women/983160.html). 자녀를 가질 계획도, 나의 본을 잇고자하는 욕심도 없었지만, 여태 실감하지 못했던 (하지만 분명 날 둘러싸고 있던) 지독한 부계사회의 맛을 보고나니 자녀 까짓거 낳아서 내 성을 물려줘버리자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일단은 뒷면 작성방법에 '3, 4, 5, 8번 란은 해당되는 사람만 기재'하라기에 4번 란은 어디에도 체크하지 않은채로 접수대에 제출해보았다: 한국 국적이라면 모두 작성해야한단다. 그 자리에서 '아니오'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의 작은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커다란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비교적 난이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껏 꽤나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권위적이지 않고 든든한 부모님 덕에 가부장제를 직접 맞닥뜨릴 일이 거의 없었고, 나만 조금 더 노력한다면 여자여서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에야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적어도 가정을 구성할 때에는) 남자가 여자에 우선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구 남친)은 어짜피 낳지 않을 건데 상관없지 않느냐고 했고, 친구는 한국에서는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이 보편적이니 그게 낫다고 했다. 만약 나중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묻는다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자녀를 가질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를 괴롭힌 것은 자녀에게 나의 성을 물려주려면 출생신고도 아닌 혼인신고 시점에서, 별도의 협의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지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게는 일종의 폭력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몇 번의 불합리에 눈감아야 '평범'한 신부, 아내, 며느리가 되는 걸까.

 

한국 사회에서 자녀에게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는 것은 숨쉬듯 자연스럽다. 하지만 잠깐 숨을 멈추고 생각해보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이 사회에서 어머니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다시금, 모두가 행복해보이는 세상에서 혼자 불편한 사람이 되는 건 이리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