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술을 마셔서 그런지 넷째 날 아침에는 눈이 일찌감치 떠졌다. 저녁 늦게 도착하여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한 어기호수를 구경할 겸 달릴 채비를 했다. 남편은 더 잔다고 했다.


호숫가를 조금 달리고 멀리서 우리 숙소를 찍은 사진. 어제보다는 날씨가 한결 개었다. 호수는 정말 넓어서 바다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날이 좋으면 수영도 할 수 있다던데, 역시나 오늘도 날씨가 아쉽다. 호숫가에는 똥이 많아서 잘 피해서 뛰어야 했다. 비가 온 뒤여서 그런지 벌레는 많지 않았다.


조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며 찍은 사진. 가운데 큰 건물에 식당과 화장실/샤워실이 있고, 우리는 게르 옆에 보이는 네모난 집에 묵었다.

남편과 아침식사를 하고 방에 돌아왔다(여기 소시지는 냄새가 정말 많이 났다). 쉬다가 가이드님께 전화를 드리니 우리 방에 와서 일정 브리핑을 해주신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우선 울란바타르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는 길에 야생말을 볼 수 있는 국립공원(지금 찾아보니 Hustai National Park란다)에 들러 하루 묵는 방법. 투어사에서는 이쪽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동거리가 줄어들테니까. 아니면 전날 대체지로 언급되었었던 어르헝(Orkhon) 폭포에서 묵고 다음 날 울란바타르로 향하는 방법. 쳉헤르는 여전히 들어갈 방법이 없는 듯 했다.

남편은 나에게 선택권을 위임했고 나는 어르헝을 선택했다. 복원한 야생말이라니 흥미롭게 들리긴 했으나, 몽골 제국의 코스모폴리탄 수도가 자리잡았던 어르헝이 더 궁금했다. 이왕 서쪽 멀리 온 김에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는 어르헝 폭포로 결정되었다(… 결정되는 듯 했다). 이쯤 되니 몽골 여름 성수기에 숙소, 차량 등에 관한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하루 만에 숙소를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행선지를 정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다보니 투어사에서 연락이 왔다. 쳉헤르에 들어갈 방법이 생겼다고. 우리와 함께 어기호수에 묵었던 한 팀이 푸르공을 근처에서 빌릴 수 있게 되어서, 우리도 그걸 타고 쳉헤르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뜨끈한 온천이 간절했던 참이라 우리는 곧바로 제안을 수용했고, 기분 좋게 쳉헤르로 향했다. 다른 팀과는 쳉헤르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의 초입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쳉헤르로 향하는 길에 만난 어르헝 계곡의 지류. 항상 산세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곡들과는 다르게 넓은 평원을 가로질러 흐른다는 점이 생경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럴 기회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몽골에 오게 되면 어르헝과 나이망 호수 지역을 둘러보고 싶다. 날씨운이 많이 따라줘야겠지만.


다른 팀에서 마유주를 산다고 해서 잠시 들른 현지인 게르. 말을 지키고 있는 개가 귀여웠다.


우리를 쳉헤르로 데려다 준 푸르공! 러시아 군용차였다는 푸르공은 대부분 몇십 년은 된 차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가 손에 익은 푸르공 기사님들이 여행 내내 차를 고치고 관리하며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푸르공의 주인인 기사님도 푸르공만큼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다. 푸르공이 기다리고 있던 주유소 근처에서 간단하게 점심(꼬치구이와 맥주)을 먹고 쳉헤르로 출발했다.


역시나 곳곳에 웅덩이 천지였던 쳉헤르 가는 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차들도 몇 보였다. 그 차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쳉헤르 가는 길은 쳉헤르만큼이나 (어쩌면 쳉헤르보다) 아름다웠다.


우리의 푸르공도 언덕길에서 한 번 멈춰섰다. 고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려서 쳉헤르에 들어가 있는 푸르공을 하나 부르려고도 했는데, 조금 더 기다리니 다행히 고쳐졌다. 푸르공을 타고 몽골 여행을 한다면 이렇게 쉬는 시간이 종종 생길 것 같다. 그것 또한 이런 풍경 속에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푸르공의 내부는 이렇다. 천장의 쿠션은 머리 박을 일이 많아서 설치해 둔 듯 싶다. 푸르공 내에서도 앞자리 뒷자리 차이가 있다고 하던데 우리는 오갈 때 모두 앞자리에만 앉았다. 뒤에도 앉아보고 싶었는데 동행한 젊은이들이 배려해 준 걸까. 쳉헤르행에 함께한 젊은이 네 명은 대학생쯤 되어보였는데, 점심 먹으면서 맥주를 나눠주었을 때 빼고는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혹은 혼자 여행 중이었다면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긴 이동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겠다. 남편은 외향형(E)이면서 내향형(I)인 나보다 낯을 더 가린다. 외향-내향과 외성-내성 구분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던데 그런 문제인 걸까.


몽골에서 흔히 보이는 평원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던, 쳉헤르 가는 길. 누가 처음 이 산중의 온천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쳉헤르에서는 한국인들 후기도 많은 항가이(Khangai) 리조트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예약을 한 셈이니 선택권이 거의 없었겠지만… 방문했던 4개 숙소 중에서는 제일 아쉬운 곳이었다. 우리가 묵은 게르에서는 난방을 위해 장작을 밤새 계속 투입해 줘야 했는데, 이를 놓치는 바람에 새벽에는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사실 이건 우리의 책임이니 숙소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그런데 저녁식사 후 남편과 나 모두 배탈이 난 건 우리의 책임이 아님… 폐장 직전까지 노천탕과 샤워실 모두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못 씻고 잔 것도…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 씻을 때도 물이 거의 빗줄기처럼 졸졸 나와서 힘들었다. 그동안 좋은 숙소에만 묵어버릇해서 버릇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4박 중 가장 힘든 날이었다.


우리를 괴롭힌 것은 숙소 뿐만이 아니었는데… 저녁식사 전까지 시간이 남아 승마체험을 다시 하기로 한 것이 화근이었다. 테를지에서 승마를 할 때에는 날씨가 흐렸어서, 맑은 날에 승마를 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숙소 근처의 마부들에게 물어 승마체험을 시작했는데… 마부들이 따라 오지 않는 것 아닌가? 몽골인 가이드 두 분이 말을 탈 줄 아니까 넷이서 다녀와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헬멧도 쓰지 않았는데. 젊은 가이드님은 말을 타지 않은지 오래 됐다고 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거의 단독으로 승마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건 좋았다.

약 15분 정도 이동하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멈춰선 것이 발단이었다(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내 말의 고삐에 이어진 줄을 잡고 있던 젊은 가이드님이 줄을 놓치자 모든 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워낙에도 성격이 더럽다는 가이드겸기사님의 말은 이때다 싶었는지 날뛰면서 가이드님을 떨어트렸고… 젊은 가이드님도 말에서 떨어졌다. 가이드겸기사님으로부터 해방된 남편의 말은 저멀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말에서 내리는 법을 몰라 한동안 타고 있다가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의 엉덩이 쪽으로 내렸다고 한다. 이게 알고 보니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는데… 말이 흥분해서 발길질이라도 하면 얻어맞기 딱 좋은 위치라서 그렇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이 아수라장 속에서 문제의 발단이 된 나의 말만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가이드님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말에서 내렸고, 가이드겸기사님은 내 말을 타고 도망친 말들을 잡으러 가셨다. 나와 남편은 놀란 것을 빼면 괜찮았는데 가이드 두 분은 손과 팔에 상처를 하나씩 남기셨다… 젊은 가이드님과 셋이서 터덜터덜 숙소로 걸어가고 있자니 기사님이 말들을 전부 되찾아놓곤 어린 마부들을 꾸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가장 난리를 친 기사님의 말이 마부들의 말이 아니라 친구의 말인데 이들도 성격이 더러운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엄청난 액땜이었다. 뭐 남편은 덕분에 달리는 말에도 타보고… 승마 실력이 순식간에 늘겠다(럭키비키..)


이렇게 대단한 모험을 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서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이번엔 온천 수원지로의 모험이다. 소똥인지 말똥인지 알 수 없는 똥들을 피하며 산기슭으로 향하니 수원지부터 각 리조트까지 혈관처럼 연결되어 있는 파이프들이 눈에 띄었다. 정부나 기관 개입 없이 각 리조트에서 설치한 파이프들인지 모두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이곳이 쳉헤르 온천의 수원지. 여기에도 몽골 성황당이 지어져 있다. 돌을 하나 올려놓고 기도를 드리는 듯한 현지인도 보였다. 유황 온천수가 적당히 뜨거워서 여기에 계란을 넣고 삶아먹는 것도 가능하단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잠시 자다가 저녁을 먹고 온천을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탕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앉아있다가 나왔고 샤워실 줄이 너무 길어서 씻지도 못하고 잠들어야 했다. 외국인 관광객 뿐만 아니라 몽골 현지인 관광객도 많은 듯 했다. 곳곳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서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4일차가 끝났다. 블로그를 쓰며 기억을 되짚다보니 쳉헤르 말고 본래 계획대로 어르헝 폭포에 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쳉헤르에 아쉬움이 남았겠지?

이전에 적었듯이 밤에는 날이 완벽하게 개어서 별 보기 좋은 날이었지만 나는 쿨쿨 자느라 보지 못했다. 다음 포스팅은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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