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새벽에는 귀를 때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어젯밤부터 비가 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이, 오랫동안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숙소가 튼튼해 보이지 않았으면 조금 무서웠을 것도 같다.


비가 잦아들길 기다릴 법도 하지만 오늘은 4박 5일 중 가장 멀리 이동하는 날(500km 이상)이기에 일찌감치 출발했다. 아침으로는 미역국, 김치 등 한식을 먹었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캠프 내 카페에서 라떼를 팔던데 스타벅스보다 비쌌다. 바가가즈링출루에 비해 테를지는 관광지 느낌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오늘도 힘겹게 울란바타르 시내를 빠져나오고 쳉헤르로 향하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다. 위 사진 위치정보를 확인해보니 Töv라는 곳 근처다. 양고기 냄새에 조금 지쳐있던 나는 닭다리살을 주문해서 먹었다. 그리고 가이드님을 따라 우유차(?)를 주문했는데, 우유에 뜨거운 물을 타고 소금을 첨가한 맛이었다. 가이드님 말로는 처음엔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데 중독성이 있다고 한다.

아, 오는 길에 울란바타르에서는 또다른 젊은 가이드님을 픽업했다. 처음부터 함께 한 가이드겸기사님은 사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여러가지를 함께 하고 계시는데, 본인 사업에 일손이 부족할 때 일을 부탁하던 울란바타르 대학생이라고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대학교에서 한국어교육을 공부해서 소통이 쉬웠고 이후 여행 기간 내내 정말 세심하게 잘 챙겨주셨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두 가이드님을 비롯해 몽골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하며 일정 내내 가이드와 동행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게 가이드 여행의 특장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휴게소를 빠져나오니 비가 점점 더 많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어사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쳉헤르로 들어가는 길이 워낙에도 험한 오프로드인데 어제와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차가 침수될 정도의 계곡이 생겼다고… 다른 투어팀들은 대부분 쳉헤르를 포기하고 어기호수로 향할 예정이라고 했다. 푸르공도 건너기 어려운 계곡을 SUV가 건널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결국 어기호수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경과를 지켜보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쳉헤르 온천 다음에 어기호수를 갈 예정이었는데, 순서만 바뀌는 정도니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더 이상 이동하지 말고 미니사막(엘승타사르해)에서 멈춰서 근처 좋은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어떠냐는 투어사의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미니사막은 여행 전부터 가고 싶지 않아서 일정에서 굳이 뺐었는데, 캠프가 좋다고 해서 아까운 하루를 여기에서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비를 뚫고 어기호수까지 가야하는 기사님께는 죄송했지만... 에르덴조 사원을 들러서 어기호수로 향하기로 했다. 지루하지만 평화로운 이동과 하루의 보상 같은 온천을 기대했던 셋째 날이 무거운 비와 급박한 일정 변경 속에서 흘러갔다. 

 
저녁시간, 폐장시간이 다 되어서야 에르덴조 사원에 도착했다. 우리 팀이 마지막 입장객이었던 듯 하다. 에르덴조 사원이 위치한 하라호름(Kharakhorum)은 13세기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2대 칸에 의해 완성되고 수도로 사용된 것은 20-30년 남짓이라던데. 평원을 굽이굽이 흐르는 어르헝강을 보고 있자면 칸들이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몽골 땅은 넓은 만큼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가랑비가 내리는 에르덴조 사원은 광활한 만큼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듣기로는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몽골 제국 멸망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며 그마저도 러시아와 중국의 침략을 받은 20세기를 지나며 많이 훼손된 상태라고 한다. 보존 상태가 아쉬운 편이었다.
 

 
사원을 거닐고 있으니 살가운 고양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오는 걸 보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는 듯 했다. 
 

 
사원 터는 이렇게 거의 비어있다. 대지에 박혀있는 기초석이 사원의 규모를 가늠하도록 해준다. 
 
에르덴조 사원을 떠나 근처 마트를 잠시 들른 후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 어기호수로 향했다. 마트에서는 유독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가이드님께 들어보니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 하듯이 몽골의 불교인들은 에르덴조 사원에 방문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고 한다. 하라호름과 에르덴조는 몽골인들에게 그만큼 의미가 있는 장소인 듯 하다. 
 

 
어기호수 가는 길 part 1. 아직은 포장도로. 아무리 포장도로여도 몽골의 자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특히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귀가하는 가축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양과 염소는 자동차를 무서워해서 잘 피하는 편이다. 마소는 우리가 기다려야 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엄청난 속도를 내며 달려주신 기사님… 다행히 몽골의 여름은 낮이 길다.
 

 
어기호수 가는 길 part 2. 어느 순간 포장도로가 끊기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갑자기 뚝 아스팔트 도로가 사라진다. 비포장도로는 비가 온 직후라서 상태가 더 심각하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기사님께 팁을 드리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바퀴가 어딘가 박히거나 찢기지 않길 기원한다. 앞으로 차는 사륜구동만 타야지 다짐한다. 
 

 
한참 오르막길을 올라오니 내리막의 시작점에 도달했다. 저 멀리 보이는 호수가 바로 어기호수란다. '어기(Ugii)'가 몽골어로 어머니라는 뜻이라던데, 험난한 여정의 끝에 마주한 어기호수는 이름에 걸맞는 위엄을 지닌 듯 했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용맹한 도요타 코롤라 무리를 뒤따라 갔다.
 

 
우여곡절 끝에, 해가 아주 숨어버리기 직전에 도착한 오늘의 캠프. 사실 우리는 사진에 보이는 게르가 아니라 나무로 된 오두막에서 묵었다. 이곳도 개업한지 오래 되지 않은 고급 숙소였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었지만 방과 침대가 넓었고, 어기호수를 향하고 있는 테라스에서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었다. 몽골인 관광객도 몇 명 묵고 있는 듯 했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도착하니 투어사 사장님과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내일은 어디로 가느냐고 가이드님께 물었고 아직 논의 중이라고 답하셨다. 이 날도 약주를 한 잔 했고, 긴 여정의 끝에 피로가 몰려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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